오늘은 4,19혁명이 일어난지 57주년 되는 해입니다. 국가보훈처는 오늘 10시부터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4,19 정신으로 이룩한 국민주권,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대한민국'이라

는 제목으로 기념식을 거행한다고 합니다.


당시 혁명의 중심지였던 서울시의회 청사 건물이 역사 체험 공간으로 개방되어 있는데요. 

이곳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35년에 일제 강점기 복합문화

공간인 경성 부민관으로 시작됐고, 친일파 제거를 이유로 폭파될 뻔한 아픈 역사를 간직하

고 있는 곳입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들어서기 전 까지 이곳이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고 사사오입 개헌

4,19혁명 중심지, 5,16군사정변, 국회 해산, 김두한 의원의 국회 오물 투척, 10월 유신 등 민

주주의의 아픔과 성장을  함께 한 곳입니다.







4,19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1960년 4월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

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며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한 혁명입니다.


3,15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마산 3,15 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입

학생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

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가 전국

으로 격화된 사건입니다.


4월19일 경찰은 경무대로 몰려오는 시위대에게 발포를 하며 발포 이후 시위대도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습니다. 이 처럼 전국민적인 저항에 봉착한 이승만은 결국 

4월26일 하야를 발표하게 됩니다.






3,15부정선거, 또는 3,15개표조작은 1960년 3월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

4대 대통령 선거 및 5대 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부정선거로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승만은 제4대 대통령으로 또다시 당선이 된 사건입니다.


1960년 자유당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과 자유당 소속 정치 깡패 이정재, 임화수 등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 개표조작을 감행했습니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 과정에

서 부정선거를 시위하던 학생들 중 김주열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화장된 유골이 마산 앞

바다에 유기되면서 후일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선거는 결국 국회에서 무효처리가 되

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과 이기붕은 각각 대통령직과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제1공화국 붕괴

원인이 되었습니다. 선거 전날 3월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

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습니다. 


또 3,15선거 당일날에는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가 한면, 한 명 당 투표용지를 20장

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또 기표소까지 들어가 감시를 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부정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

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습니다. 이 일로 내무부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

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출처-국가기록원



그렇게 온갖 부정이 치러진 결과 46.4%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17.5%

로 뚝 떨어지고 자유당의 이기붕은 79.2%로 당선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정 선거라는 사실이 들통 났고, 선거 이튿 날인 1960년 3월 16일 마산 등지

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3,15 마산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 한편 일부 지방에서는

투표함을 확인하던 중 투표자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경우가 발견되자 급기야 투표함을 

불태우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시위가 지속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며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

하고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공산주의가 개입했다며 되도

않는 말까지 꺼내며 폭력적인 진압을 강행하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리하면 용공으

로 몰아가는 것이 똑같은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고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졌습니다. 특히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귀가하는 도중에 정치깡패들이 그들을 덮쳐 학생 2명이 죽고, 수

십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국민들의 항쟁으로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4월

27일, 제1공화국은 그렇게 붕괴되었고 내각 책임제를 바탕으로 하는 윤보선 대통령의

제2공화국이 출범되었습니다.